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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연합뉴스

     

    국가대표 서장훈

    서장훈은 연세대 시절 1994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 첫 발탁이 되어 2006 도하 아시안게임까지 12년간 국가 대표로 활약했습니다.  이때는 아시아에서 중국이 최강자였다. 왕즈즈, 야오밍의 높이가 있었기에 서장훈은 밀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장훈,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을 기억할 것입니다. 결승서 기적적으로 중국을 꺾고 금메달을 차지 했습니다. 서장훈 역시 15득점 6리바운드로 승리에 공헌했습니다. 저 역시 이 경기를 보았기에 이 날의 기적은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국가대표 출전이었던 2006년은 도하에서 5위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이 경기를 끝으로 서장훈은 국가대표를 은퇴하는 순간이 되었습니다. 

    서장훈만의 스타일로 승부하다.

    서장훈은 대학시절에도 대단했지만, 용병이 있는 프로에서도 그의 가치는 엄청났습니다. 용병이 존재했지만 자신에게 많은 롤을 요구했고, 그 롤을 모두 소화해내며 항상 팀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서장훈은 센터라는 포지션의 틀을 깨버렸습니다. 골밑으로 들어오는 공을 받아 포스트업을 통한 득점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외곽에서 3점슛도 쏘았습니다.  센터임에도 불구하고 슛이 정확했습니다. 이는 농구는 처음 접했을 때부터 엄청난 연습의 결과라고 방송에서 말한 바 있습니다.  

    서장훈 덕분에 빅맨의 역할이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즘 KBL리그를 보면 빅맨도 슛을 장착해야 살아남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골밑의 제왕으로 불리는 오세근 마저도 3점슛을 장착했습니다.

     

    실력과는 다르게 냉정한 팬들의 평가

    서장훈은 실력으로만 봐서는 최고였습니다. 하지만 프로 생활을 하는 동안 팬들로 하여금 이미지는 좋은 편이 아니었습니다. 잦은 심판 항의, 매번 인상을 쓰고 플레이를 한다는 등, 많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서장훈은 상대편으로 하여금 집중 견제를 데뷔순간부터 은퇴하는 순간 까지 받아왔습니다. 거친 파울은 기본이었고, 자칫 선수 생명까지 위협을 가하는 파울들이 서장훈이 욕하고, 인상을 쓰며 항의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팬들은 그런 것들보다 짜증나 있는 서장훈의 모습만 보고 판단을 했습니다.  100% 서장훈의 잘못도,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없었기에 이미지 관리에서는 실패했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퇴 한지 오래 된 지금도 실력적으로는 서장훈을 배제 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역대 베스트5등을 말할 때면 언제나 서장훈은 가장 먼저 올라가 있습니다. 허재와 같은 케이스라고 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서장훈의 13,231득점, 5,235리바운드의 기록만큼 팬들로 하여금 오랜 세월이 지나도 서장훈이라는 선수는 최고로 기억 될 것임에 분명합니다. 어서 농구계로 다시 돌아와서 지도자로서 팬들과 마주할 날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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